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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notice 호남신학대학교의 공지사항 입니다.
제목 메리 알렉산더 호퍼 브라운 여사(Ms. Mary Alexander Hopper Brown : 1922-2018) 소천
글쓴이 송인동      날짜 2018-04-18 18:36:17 조회수 3,266

호남신학대학교 설립 초창기에 크게 기여하셨던 부명광 목사님(Rev. George Thompson Brown)의 부인(Mrs. Mardia Alexander Hopper Brown)께서 410(미국 시간) 미국에서 소천되셨습니다. 장례예배는 422(주일) 디케이터 장로교회(205 Sycamore Street, Decatur, Georgia 30030)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호남신학대학교에서는 고만호 이사장과 최흥진 총장의 명의로 유족들에게 조의를 표하였으며 그 내용은 422일 장례예배 때 유족들에 의해 낭독이 될 예정입니다.

 

고인이 된 Mardia Alexander Hopper Brown 여사와 George Thompson Brown 목사 내외분이 직접 건축하여 기거하시던 사택은 호남신학대학교 선교동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기독간호대 기숙사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브라운 목사 내외분과 그 자녀들의 기도와 애환과 영원한 추억이 깃든 마음의 고향입니다.

 

Mardia Alexander Hopper Brown 여사의 유족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소식에 댓글로 조의를 표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음은 Mardia Alexander Hopper Brown 여사의 소천에 즈음하여 유족들이 보내온 사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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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

 

메리 알렉산더 호퍼 브라운 여사

(Ms. Mary Alexander Hopper Brown : 1922-2018) 


소천


메리 알렉산더 호퍼 브라운 여사(Ms. Mary Alexander Hopper Brown).jpg

 

 

메리(마르디아: Mardia) 알렉산더 호퍼 브라운 여사께서 2018년 4월 10일 미국 조지아주 스톤마운틴의 파크스프링스 양로원에서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브라운 여사의 장녀가 임종을 함께하였습니다. 브라운 여사는 향년 95세이며 1922년 11월 22일 한국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부모님은 브라운 여사가 태어나기 2년 전에 한국에 도착한 장로교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메리 브라운 여사는 평생 동안 성경 속의 마리아에 대한 한 한국어 음역 단어인 마르디아라고 불리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일제 강점기 치하였습니다. 메리의 가족이 살던 목포는 중요한 식민지 항구이었으나, 좀 더 나은 선교 병원이 오늘날 주된 미 공군 기지가 있는 곳에 가까운, 목포에서 서해를 따라 북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군산에 있었습니다. 메리와 그녀의 두 형제인 조와 조지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동료 선교사들의 지도로 목포에서 칼버트 코스라는 홈스쿨링 과정을 통해 배웠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선교사 후원 기숙학교인 평양외국인학교에 다녔습니다. 메리는 1939년 6월 졸업식에서 고별사를 하는 졸업생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지는 문제들로 인해 그 학교가 폐쇄되기 1 년 전이었습니다. 메리가 3학년일 때, 미래 남편감이 될 토미 브라운이 상하이 아메리칸 스쿨로부터 평양 외국인학교 4학년으로 전학을 왔습니다. 그것은 일본이 1937년 상하이를 공격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토미의 부모 역시 40년 동안 중국 서주에 배치되어 사역하였던 장로교 선교사였습니다. 평양에서 토미는 메리의 오빠인 조(조셉)와 한 방을 썼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데이비슨대학에 메리의 오빠 조와 함께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토미는 메리에게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청혼할 정도로 충분한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토미는 전시 미 육군 중위로서 국가안보국의 전신인 전시 육군 통신부대에서 근무하였습니다. 메리는 조지아주 디케이터에 소재한 아그네스 스콧 대학에서 성서연구를 전공하고 갓 졸업한 상태였습니다. 토미와 메리는 전시기간 동안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1944년에 마르디아(메리)는 첫 아기인 메리를 나았으며, 1년 뒤 버지니아주 마리온에서 조지를 나았습니다. 1951년 메리의 남편 토미가 신학교를 마치고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가스토니아에서 두 교회를 돌보고 있을 때 빌이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메리와 토미는 중국으로 갈 장로교 선교사로 배정 받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몰락으로 상황이 변하였습니다. 메리와 토미는 도쿄에서 한국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2년을 지낸 후, 남한에 위치한 메리의 어린 시절 고향으로 배치되었습니다. 전쟁에 찢기고 황폐화된 시골에 배치된다는 것은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메리가 자라났던 집은 공산군의 진격으로 불타서 무너져버렸고 메리 가족의 교우들이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메리와 그녀의 남편 토미는 광주에서 15년 동안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동안 광주에서 메리와 토미는 호남신학대학교를 설립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호남신학대학교는 이제 어엿한 규모를 갖춘 장로교 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55년 메리는 광주에서 가까운 전주에서 딸 샬롯을 출산하였습니다. 전주는 메리의 오빠이자 선교사였던 조와 그 가족이 살았던 도시였습니다. 메리가 소천된 4월 10일은 그녀의 막내 아들 브루스의 60세 생일날이었습니다. 브루스는 메리와 토미가 195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와 있을 때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때 메리의 남편 토미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테네시주 내쉬빌에서 선교본부 사역을 하며 또 한 차례의 안식년을 보낸 후 1969년에 메리와 토미의 가족은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토미는 선교사무국을 관할하였습니다. 메리와 토미는 서울 외국인 학교 곁에 위치한 연희동 집을 새로 지었으며 서울 유니온교회를 섬겼습니다. 메리는 많은 선교 사역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한국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몇 주간 동안 마르디아(메리)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1973년 서울 전도집회를 도왔습니다. 서울 집회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집회 중 최대 규모의 인파가 모인 집회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메리의 남편 토미가 조지아주 애틀란타에 있는 미국 남장로교회의 세계선교부 책임자로 발령이 났습니다. 메리와 토미는 가까운 디케이터로 이사를 왔으며 2004년 파크 스프링스 양로원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마운트 버논 스트리트에 있는 메리와 토미의 집은 아그네스 스콧 대학과 가깝고 디케이터 장로교회와도 가까웠습니다. 디케이터 장로교회는 메리와 토미가 선교사로서 생애를 보내는 동안 꾸준히 후원하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마르디아(메리)는 집사와 장로로 여러 해를 섬겼습니다. 이 시기에 마르디아(메리)는 콜롬비아 신학생들을 비롯하여 입을 만한 헌 옷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미션 헤이븐 옷장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마르디아(메리)의 부모님은 켄터키주 스탠포드 출신의 조셉 던랩 호퍼 목사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록힐 출신의 애니스 배론 호퍼 여사이십니다. 호퍼 목사님 내외분은 한국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는 192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사역한 후 은퇴하고서 노스캐롤라이나주 몬트리트와 하이포인트에서 생활하였습니다. 마르디아는 남편 조지 톰슨 브라운 목사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습니다. 브라운 목사는 파크 스프링스에서 2014년 1월 21일 소천되셨습니다. 마르디아는 또한 한국 선교사로 은퇴하여 몬트리트에서 살던 오빠 조셉을 1992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으며 마르디아가 소천되기 꼭 2주 전인 3월 29일에 전 툴레인대학교 교목이던 남동생 조지를 하늘나라로 먼저 보냈습니다. 마르디아 브라운 여사의 유족으로는 5남매와 그 배우자들이 있습니다: 딸 메리 브라운 벌록은 전 아그네스 스콧 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중국 쿤샨대학교의 설립 부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디케이터에 살고 있습니다. 아들 조지 탐슨 브라운은 전 프렌드십 포스 인터내셔널 총재를 역임하고 현재 애틀랜타에 살고 있습니다. 아들 윌리엄 배런 브라운은 CIA와 미국 상무부에서 공직생활을 하였으며 현재 버지니아주 헌던에 위치한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북)한중경제를 강의하는 조교수로 있습니다. 딸 샬롯 브라운 힐은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IBM 전문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들 브루스 페린 브라운은 애틀랜타에 있는 매케나 롱 앤 앨드리지의 파트너였으며 현재는 애틀랜타의 브루스 피 브라운 법률 회사의 대표입니다. 마르디아 브라운 여사의 손자녀는 16명이며 증손자가 8명입니다.   


  

마르디아(메리) 브라운 여사의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던랩, 배런)의 빨강머리로 인한 소동이 유명하였는데 그 빨강머리는 결국 순 백발이 되었습니다. 마르디아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어느 날 그녀가 엉엉 울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한국인) 아이들 모두가 자기를 뚫어지게 쏘아보면서 마르디아를 작은 악마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마르디아의 어머니께서 대답해주셨습니다. “마르디아야, 너는 이 사람들이 본적이라곤 없는 검은 머리가 전혀 없는 유일한 어린 아가씨란다. 네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빨강머리 어린 소녀들을 대표하는 대사님으로 한국에 와있다고 생각해봐.” 그 말씀에 어린 마르디아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하였고 삐쳤던 일이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한국인 K-팝 가수들이 빨강머리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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